
아린은 한동안 기계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흰색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했다. 먼지가 덮이지 않은 부분만 원래 색을 짐작할 수 있었고, 몸체 곳곳에는 긁힌 자국과 오래된 충격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래도 완전히 망가진 물건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망가졌다기보다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린은 손전등을 입에 물고 몸체 옆을 살폈다.
“전원은 어디 있고.”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조금 전까지 일정한 간격으로 깜빡이던 표시등도 지금은 완전히 꺼져 있었다. 아린은 생각을 고쳤다.
“기계잖아.”
말하고 나서 주위를 한번 봤다. 아무도 없었다. 그 사실을 확인하자 조금 편해졌다.
아린은 가방을 내려놓고 공구 케이스를 열었다. 오래된 게임기를 모으다 보면 규격이 안 맞는 단자나 제각각인 전원 규격 정도는 특별할 것도 없었다. 몇 번의 확인 끝에 외부 전원 포트와 맞는 조합을 만들었다. 보조 전력 장치를 꺼내 연결했다. 처음부터 정격 전압을 넣지는 않았다.
“일단 낮게.”
아무 일도 없었다. 출력을 조금 올려보았으나 여전히 조용했다. 한 단계 더.
딸깍.
아린의 손이 멈췄다.
기계 안쪽에서 아주 작은 소리가 났다. 잠시 뒤 몸체 옆 표시등 하나가 켜졌다. 한 번. 두 번. 쉬었다가 다시 한 번.
아린이 몸을 앞으로 숙였다. 화면에서 수십 번 본 간격이었다.
“너 맞구나.”
외부 포트가 살아나자 아린은 개인 단말을 바로 물리지 않고 격리 어댑터를 거쳤다. 정체를 모르는 시스템을 그대로 연결할 생각은 없었다. 잠시 뒤 신호가 들어왔다.
[LINK(연결) DETECTED(감지됨)]
[LOCAL BUS(로컬 버스) ........ ONLINE(온라인)]
[MEMORY(메모리) ........ DEGRADED(열화됨)]
[PRIMARY POWER(주 전원) ........ UNAVAILABLE(사용 불가)]
[MOBILITY(이동 기능) ........ OFFLINE(오프라인)]
아린의 눈썹이 올라갔다.
“모빌리티?”
몸체 아래쪽에 바퀴처럼 보이는 구조물이 있었다.
“움직였어?”
화면이 바뀌었다.
[DIAGNOSTIC MODE(진단 모드)]
아린은 개인 단말로 기계의 저장소에 접속해보았다. 대부분은 손상돼 있었다. 깨진 로그와 시스템 파일 사이로 읽을 수 있는 짧은 텍스트 몇 개만 남아 있었다.
첫 번째 파일.
// Observation must precede interpretation. (관찰은 해석에 선행해야 한다.)
아린이 화면을 바라봤다.
“뭐야.”
다른 파일에도 비슷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OBSERVATION THREAD(관찰 스레드)]
[CONTEXT RETENTION(맥락 유지)]
그 아래는 전부 손상돼 있었다. 아린은 복구 가능한 기록만 자신의 단말로 복사했다. 그 순간 화면이 바뀌었다.
[BOOT PRIORITY UPDATED(부팅 우선순위 갱신)]
아린의 손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업데이트 안 했는데.”
[COMMUNICATION SUBSYSTEM(통신 서브시스템) ........ ONLINE(온라인)]
“어어, 잠깐.”
전력 장치의 소모량이 갑자기 올라갔다.
“아니. 그거 안 켰다구.”
기계 안쪽에서 짧은 구동음이 났다. 하나뿐이던 표시등 옆으로 두 번째, 세 번째 불이 연달아 켜졌다.
아린이 서둘러 입력했다.
[HALT COMM(통신 중지)]
응답 없음. 다시 입력했다.
화면에는 다른 문장이 먼저 나타났다.
[UPSTREAM SEARCH(상위 연결 검색)]
아린은 손을 멈췄다.
“뭐?”
[NODE 01(연결 지점 01) ........ NO RESPONSE(응답 없음)]
다음 Node. 그다음 Node. 번호가 올라가도 돌아오는 것은 같았다.
[NO RESPONSE(응답 없음)]
“어딜 찾는 건데.”
그러다 화면의 형식이 바뀌었다.
[FALLBACK ROUTE(대체 경로)]
[LEGACY NODE REQUEST(구형 연결 지점 요청)]
잠시 후.
[NODE 01 ........ ACTIVE(활성)]
딸깍. 벽의 낡은 제어반 하나에 불이 들어왔다.
아린이 고개를 들었다.

[NODE 03 ........ ACTIVE]
복도 안쪽에서 또 하나.
딸깍.
[NODE 08 ........ ACTIVE]
더 먼 곳에서 다시 불빛이 깜빡였다. 아린은 화면과 복도를 번갈아 봤다. Node가 살아날 때마다 실제 설비도 하나씩 응답하고 있었다.
[RELAY LEGACY-04(구형 중계기 LEGACY-04)]
[MAINT NODE W—(정비 연결 지점 W—)]
아린이 구도심 지도 창을 열었다. 이미 사라진 설비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B-04에서 서쪽으로 하나씩 연결되고 있었다.
[HANDSHAKE ACCEPTED(연결 확인 성공)]
[NODE 47 ........ ACTIVE]
숫자가 멈췄다. 화면 위로 살아난 경로가 가느다란 선처럼 이어졌다. 지도에는 없는 길이었다.
“미친.”
화면이 다시 바뀌었다.
이번에는 그 길 끝에서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FALLBACK REQUEST(대체 요청)]
[TARGET(대상): ########]
[STATUS(상태): UNAVAILABLE(사용 불가)]
[RETRY(재시도)]
아린이 가까이 다가갔다.
“목표가 어디야.”
보조 전력 장치에서 경고음이 났다. 아린이 화면을 봤다. 남은 전력이 빠르게 내려가고 있었다.
“야야, 잠깐.”
[RETRY]
“그만.”
아린이 케이블로 손을 뻗었다. 그보다 먼저 기계의 표시등이 일제히 아주 짧게 밝아졌다가, 시들어버리듯 꺼졌다. 복도 저편에서 살아났던 불빛들도 하나씩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몸체 옆 작은 표시등 하나만 남았지만, 그것마저 곧 꺼졌다.
아린은 손을 뻗은 자세로 멈춰 있었다. 보조 전력 장치를 확인했다.
[7%]
아린이 천천히 기계를 봤다.
“……너 방금 뭘 한 거야.”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노아는 안테나의 커넥터를 조이고 있었다. 작업소 옥상에는 바람이 조금 불었다. 중계기 하나가 오전부터 수신이 불안정했고 원인은 단순했다. 방수 처리가 오래돼 단자 안쪽으로 습기가 들어갔다. 노아는 교체한 커넥터를 다시 한번 당겨봤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수신기를 켰다.
“테스트.”
이어폰에서 렌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린다.”
“레벨.”
“잠깐만.”
노아가 화면으로 신호가 정상 범위에 들어왔음을 확인했다. 렌이 말했다.
“그대로. 덮어.”
노아는 방수 캡을 씌웠다.
“끝.”
“내려와. 점심 먹자.”
“응.”
수신기를 끄려던 손이 멈췄다. 이어폰 아래로 작은 소리가 섞였다.
치직.
노아가 화면을 봤다. 업무 채널 옆의 정확히 등록된 대역은 아니었다. 다이얼을 조금 돌렸다. 신호가 사라졌다. 되돌리자 다시 나타났다. 짧은 파형, 그리고 정적. 다시 짧은 파형. 노아는 기록을 켰다.
“뭐야.”
사람 목소리도 아니고, 음성처럼 변조된 것도 아니었다. 일정한 신호 위로 짧은 데이터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반복되고 있었다. 노아는 필터를 바꿔가며 신호를 잡아내려 했다. 몸을 돌려보거나 안테나 입력을 바꿔보았다. 조금 강해졌다가 약해졌다.

아래에서 렌이 올라왔다.
“안 내려오고 뭐 해.”
노아는 대답하지 않고 수신기를 들었다. 렌이 옆에 섰다.
“또 뭐 잡았냐.”
“몰라.”
“목소리?”
“아니.”
노아는 신호를 다시 들었다. 짧고 긴 간격이 반복됐지만 주기는 일정하지 않은 게 이상했다. 무작위도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가 다급하게 응답을 요청하는 것 같았다.
노아가 화면을 넘겼다.
“옛날 규격인가.”
“보자.”
렌이 손을 내밀었지만 노아는 수신기를 주지 않았다.
“잠깐.”
방향을 조금 바꿨다. 신호가 강해졌다.
“서쪽.”
“그래서?”
“이쪽에서 와.”
렌은 수신기보다 노아를 봤다.
“방송?”
노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자동신호?”
“그럴 수도 있고.”
노아는 파형을 확대했다. 같은 데이터가 반복되는 것 같았지만 대상을 바꿔가며 호출하는 것처럼 조금씩 달랐다. 한 곳에 보내는 신호가 아니라 닿는 곳을 찾는 신호.
노아가 말했다.
“이건 방송이 아니야.”
렌이 기다렸다. 노아는 이어폰을 다시 귀에 댔다. 신호가 약해지고 있었다.
“누군가를 찾고 있어.”
렌이 옥상 난간 너머 서쪽을 봤다.
“그걸 어떻게 알아.”
“그냥.”
렌이 노아를 한번 봤다. 노아가 먼저 말했다.
“확인할게.”
“일단 밥부터.”
“끊기는데.”
“밥은 더 빨리 끊겨.”
노아는 이미 장비 가방을 집고 있었다. 렌이 한숨을 쉬었다.
“어디인지도 모르잖아.”
“방향은 알아.”
“그래서.”
노아가 계단으로 내려갔다. 렌이 뒤에서 말했다.
“위치 보내.”
“응.”
“그리고 이번엔 사람 말 좀 듣고.”
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렌이 난간에 기대며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안 듣겠네.”
아린은 보조 전력 장치를 한참 바라봤다.
[7%]
집까지 가는 데 필요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다시 켜봤다가 이번에는 완전히 끝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기계 앞에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번에는 네 마음대로 폭주하면 안 돼.”
대답 없음.
“통신도 켜면 안 돼.”
아린은 잠시 생각했다.
“말해도 모르겠지.”
다시 한번 전원 라인을 확인했다. 이번에는 출력 한도를 더 낮췄다. 완벽하게 막힌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통신 쪽으로 가는 라인도 소프트웨어에서 막았다. 그래도 아까에 비하면 만반의 준비였다. 아린은 전원을 넣었다.
딸깍.
표시등 하나가 들어왔다. 화면.
[LOCAL BUS ........ ONLINE]
[LOW POWER MODE(저전력 모드)]
아린은 기다렸다.
[COMMUNICATION SUBSYSTEM ........ BLOCKED(차단됨)]
“그래.”
그녀가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이제 얌전히 있어.”
화면에 커서가 깜빡였다. 아린은 연결된 개인 단말에 진단 명령을 입력했다.
[IDENTIFY(식별)]
한동안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 화면에 문장이 나타났다.
[IDENTIFICATION DATA AVAILABLE(식별 데이터 확인 가능)]
“그럼 보여줘.”
아린이 빠르게 요청을 입력하자, 한 줄의 짧은 문자가 화면에 나타났다.
[C0C0R0]
아린은 눈을 깜빡였다.
“……C 제로 C 제로 R 제로?”
그 순간 기계 안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처음에는 스피커 잡음인 줄 알았다.
치직. 짧은 노이즈. 그리고 음성.
“COCORO(코코로)입니다.”

아린이 그대로 굳었다. 기계가 말했다. 이번에는 분명히. 아린은 반사적으로 뒤를 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다시 기계를 봤다.
“너…… 말해?”
“가능합니다.”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평범했다. 기계음은 조금 섞여 있었지만 오래된 안내 장치처럼 딱딱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정면의 디스플레이 패널에 어느새 두 개의 작은 눈이 표시되어 있었다. 아린이 천천히 물었다.
“지금 상태 확인할 수 있어?”
“가능합니다.”
“어디 고장났는데?”
짧은 정적.
“질문의 범위가 넓습니다.”
아린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래.”
이상하게 사람보다 편했다. 상대가 기계라고 생각하자 질문이 쉬워졌다.
“현재 작동 불가능한 기능만.”
“Primary power unavailable. Mobility unavailable. External communication restricted. Memory integrity incomplete. (주 전원 사용 불가. 이동 기능 사용 불가. 외부 통신 제한. 메모리 무결성 불완전.)”
“메모리는 얼마나?”
“정확한 평가가 불가능합니다.”
“왜?”
“평가에 필요한 기준 데이터 일부가 손상되었습니다.”
아린은 화면에 값을 띄웠다.
“그럼 살아 있는 건.”
잠시 후.
“살아 있음의 기준이 필요합니다.”
아린이 머리를 긁으며 기계에게 말했다.
“작동하는 거.”
“해당 표현이 더 정확합니다.”
“알았어. 작동하는 거.”
화면에 목록이 올라왔다.
[일부 센서. 기본 연산. 로컬 저장소. 제한된 음성. 낮은 단계의 구동 제어.]
그리고 몇 개는 이름조차 깨져 있었다. 아린은 목록을 저장했다.
“아까 뭘 한 거야?”
“연결을 복구했습니다.”
아린의 손이 멈췄다.
“어디랑?”
“확인합니다.”
표시등이 한 번 깜빡였다. 잠시 후.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럼 뭘 복구한 건데.”
“경로입니다.”
“어디로 가는?”
“대상 정보를 읽을 수 없습니다.”
아린은 아까 로그를 열었다.
[TARGET: ########]
“이거?”
“예.”
“어딘지 몰라?”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찾았어?”
이번에는 대답이 조금 늦었다. 아린은 화면을 봤다. 디스플레이 패널의 작은 눈이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기계 자신도 답을 찾는 것처럼.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린은 손을 멈췄다.
“그게 이유야?”
“현재 접근 가능한 정보에서는 그렇습니다.”
아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왜 찾는지는 모르면서, 찾아야 한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로그를 훑었다. 조금 전에는 못 본 작은 파일 하나가 생겨 있었다. 대체 절차가 실행되면서 활성화된 것 같았다.
// The event itself is not the pattern. (사건 자체가 패턴인 것은 아니다.)
// Observe what follows. (그 뒤에 무엇이 이어지는지 관찰하라.)
아린은 눈을 좁혔다.
“또 이 사람이네.”
“대상을 특정할 수 없습니다.”
아린이 고개를 들었다.
“너한테 한 말 아니야.”
“확인했습니다.”
아린은 피식 웃을 뻔하다가 멈췄다.
“너 괜찮아?”
“괜찮음의 기준이 필요합니다.”
“……이러다 날 새겠는데.”
아린은 잠깐 생각했다.
“지금 당장 꺼질 것 같냐고.”
COCORO가 답했다.
“죽음 상태가 아닙니다.”
조금 늦게 한마디가 더 붙었다.
“아마도.”
아린의 눈썹이 올라갔다.
“아마도?”
“현재 진단 정확도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걸 먼저 말해야지.”
“순서를 수정하겠습니다.”
아린은 COCORO를 바라봤다. 처음에는 버그로 시작해서 그 다음에는 좌표였다. 그 아래에는 이 기계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기계가 자신에게 순서를 수정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게 이상했다. 아린은 한쪽 무릎을 세우며 몸을 세웠다.
“여기 두고 갈 순 없겠네.”
COCORO의 작은 눈이 아린 쪽으로 움직였다.
노아가 B-04를 알아본 것은 표지판보다 먼저였다. 골목 끝, 무너진 창고, 기울어진 철골. 한번 와본 곳이었다. 그는 걸음을 늦췄다.
수신기 신호는 이미 거의 사라져 있었지만 방향은 맞았다. 지난 번 자신이 지나갔던 길. 첫 번째 콘크리트 조각, 두 번째는 피하고, 철골 아래. 자연스럽게 오른쪽 벽으로 손이 갔다. 노아는 손을 멈췄다. 자신이 던진 타일 조각 때문에 무너져 생긴 구멍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구멍 아래는 어두웠다.
노아는 수신기를 확인했다. 아래쪽에서 신호가 아주 약하게 잡혔다. 그는 손전등을 켜 구멍 안을 비췄다. 바닥까지는 생각보다 멀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노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하나, 둘.”
아린은 COCORO의 몸체 아래에 양팔을 넣었다.
“셋.”
들었다. 아니, 들려고 했다. 몸체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가 다시 바닥에 닿았다.
쿵.
아린은 그대로 앉았다.
“뭐가 이렇게 무거워.”
“질량 측정 기능이 현재 제한되어 있습니다.”
“안 물어봤어.”
“확인했습니다.”
아린이 COCORO를 노려봤다.
“너 아까부터 은근히 말 많다.”
COCORO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린이 한숨을 쉬었다. 사다리까지는 멀지 않았다. 문제는 이걸 들고 어떻게 올라가느냐였다. 그래도 여기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아린은 가방 끈을 짧게 조였다. COCORO 아래쪽을 다시 잡았다. 이번에는 완전히 들지 않고 한쪽을 들어 조금씩 밀었다.
긁히는 소리가 났다.
“미안.”
“외장 손상은 기존 손상 범위보다 작습니다.”
“그래도.”
조금 이동하고 멈추길 반복했다. 아린의 앞머리가 눈앞으로 내려왔다.
“레트로 게임기는 손잡이라도 있지.”
“비교 대상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괜찮아. 모르는 게 나아.”
사다리가 보였다. 아린은 COCORO를 세워보려다 포기했다.
“잠깐. 일단 여기까지.”
그녀가 허리를 펴고 숨을 몰아쉬었다. 그 순간 위쪽에서 아주 작은 소리가 났다. 자갈 하나가 떨어졌다.
톡.
아린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봤다. 구멍 가장자리에 사람 얼굴이 있었다.

“악!”
손에서 힘이 빠졌다. COCORO가 앞으로 기우는 것을 아린이 황급히 붙잡았다.
“잠깐, 잠깐!”
겨우 다시 세웠다. 심장이 세게 뛰었다. 고개를 들자 남자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검은 머리, 어두운 옷, 아무 말 없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린은 COCORO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뭐, 뭐예요?”
남자가 잠깐 멈췄다.
“미안.”
“어,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요?”
“방금 왔는데.”
아린은 숨을 고르려 노력했다. 사람과 화면 없이 이렇게 말을 섞은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거기에 저 남자는 소리도 없이 나타나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자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아린이 붙잡고 있는 흰 기계. 아린도 그 시선을 따라갔다. 그리고 바로 다시 남자를 봤다.
“저기.”
목소리가 생각보다 작게 나왔다. 아린은 다시 말했다.
“그게…… 이거, 제가 먼저 찾았거든요.”
남자가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뭐?”
“아… 아니, 그러니까.”
아린은 자신이 왜 구차하게 설명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가… 가져가시려는 거면, 이거는 제… 제가 먼저 찾았고요. 그리고 지금 부… 분석 중이라서…… 아직 뭔지도 정확히 모르고.”
“안 가져가.”
아린의 말이 멈췄다.
“네…?”
남자는 계속 아래를 보고 있었다. 아린은 COCORO를 조금 더 자기 쪽으로 당겼다.
“……그래요?”
“응.”
짧은 침묵. 그런데 남자는 가지 않고 계속 보고 있었다. 아린은 점점 불편해졌다.
“…그런데.”
남자가 아린을 봤다. 아린은 시선을 바로 마주치지 못하고 COCORO 쪽을 봤다.
“왜… 어째서… 계, 계속 그러고 계세요?”
남자의 시선도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COCORO의 하부, 비스듬하게 꺾인 작은 바퀴. 그가 말했다.
“바퀴가 깨졌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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